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한 줄 노트
-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 ‘염려를 주님께 맡긴다’는 말을 부주의하고 무책임한 삶의 태도를 가져도 상관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묵상질문
오늘 당신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가요?
묵상 레시피
(야고보서4:13-17)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마태복음 6:33)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본문은 세상 가치에 골몰한 사람을 무엇에 비유합니까? (13절)
- 이들을 향한 야고보서의 탄식은 무엇입니까? (14절)
- 삶과 계획에 가장 우선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15절)
- 주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16절)
- 이를 깨달은 이들이 갖는 삶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17절)
오늘이나 내일이나(13절, 헬 세메론 에 아우리온)
결단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려는 조급함을 표현할 때 사용되는 관용구다. ‘가서-유하며’와 ‘장사하여-보리라’ 모두 미래형이 사용되었다. 이 사람은 시간적인 계획(오늘, 내일, 일년)과 공간적인 계획(어떤 도시), 뚜렷한 목표(이익을 보리라)를 세운다. 이 상인의 최우선은 경제적, 세상적인 가치와 기준이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안개(헬, 아트미스)’는 아침에 피는 안개, 즉 자연 현상이라기보다 물이 끓어올랐다가 금새 사라지는 수증기를 뜻한다. 인간의 생명을 ‘수증기’, ‘연기’에 비유하는 것은 인생의 무상과 덧없음을 나타낸다.
허탄한 자랑을 하니(16절)
여기에 쓰인 헬라어 ‘알라조니이아이’는 자만하고 교만한 것을 뜻한다. 생명이 있어야 ‘이것저것’도 할 수 있다(13절). 그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생명의 무상함을 모르는 이들의 장황한 설명이나 전략, 계획은 허풍이나 교만에 불과하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17절)
‘선을 행하다’는 의미는 단순히 자선이나 선행이 아니라 ‘올바른 일’, ‘정의로운 일’을 뜻한다. 생명과 미래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는 자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 기뻐하시는 삶을 산다. 독단적인 계획과 미래, 생을 설계하는 삶을 행하지 않는다.
1.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다
‘염려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은 챔버스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챔버스의 좌우명 중 하나가 ‘염려하지 않기로 작정 하는 삶’이라는 것을 이전 묵상에서 여러 번 나눴습니다. 오늘 묵상은 5월 18일 묵상과 맥이 통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늘 말씀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초점입니다.
오늘 말씀은 산상수훈 말씀 중 일부입니다. 챔버스는 이 말씀이 ‘우리 인간이 들을 수 있는 가장 혁명적인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혁명적이라는 것은 기존의 가치를 뒤집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일례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늘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 부분은 신앙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큰 관심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이죠. 이러한 관심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순서를 반대로 만드십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당신 삶의 최대 관심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삶의 수단’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기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에서 이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나 죽으나 예수님을 단단히 붙들고 신실하신 그분께 자신을 의탁하십시오. 모두가 실망시킬 때 그분만이 그대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대가 사랑하는 분은 그 어떤 경쟁자도 허락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홀로 그대의 마음을 소유하고 왕으로서 좌정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대가 모든 피조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면 예수님이 기꺼이 그대와 함께 거하고자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사람에게 의탁한다면, 의탁한 것이 무엇이든 모두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신뢰하지도 말고 의지하지도 마십시오. 모든 육체는 풀이요 모든 육체의 영광은 들의 꽃처럼 시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주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라는 말이 우리의 의무를 게을리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챔버스의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들의 삶에서 가장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대 관심사로 삼으면,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 삶을 돌보실 것입니다.
2. 책임감 있는 삶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면, 우리 삶의 무관심과 부주의를 정당화 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하는 염려가 우리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에 부주의해서 고생을 하고, 이 땅에서 우리가 돌볼 것이 아무것도 없는 듯이 행동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부주의를 합리화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삶의 최대 관심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첫째로 두고 다른 모든 것은 그 다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이 세상 것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최선을 다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주신 세상이니 말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을 본문으로 ‘이렇게 믿어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눴던 예화가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하용조 목사님의 책 [사랑하는 그대에게]에서 보았던 예화입니다.
선교가 거의 불가능한 모슬렘 지역에서 40년간 일해 오신 한 선교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그분이 대답하셨습니다.
“제게는 좋은 후원자가 있습니다. 바로 마태복음 6장 3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이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선교사님은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나 사막을 걷고 있을 때나 세상 후원자가 다 끊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이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내일 일 때문에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당신의 내일은 암흑이 가득 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까? 오색찬란한 무지개가 보장된 희망의 초장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내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믿음이 없으면 내일은 언제나 절망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면 내일은 언제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만 내일의 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반면 내일의 염려 때문에 오늘을 슬프고 게으르게 살면, 내일의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늘을 기쁘고 의롭게, 그리고 감사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이 내일을 축복의 장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당시 예화와 함께 제가 이런 설교를 했더군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과 관계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내일은 늘 소망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신 이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챔버스는 이러한 혁명적인 삶에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 삶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 의탁하는 것은 가장 힘든 훈련 중 하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