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고전 2:4
한 줄 노트
- 복음의 능력은 우리의 말을 통해 ‘무엇이’ 드러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묵상질문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입술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요?우리에게는 끝까지 자신이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나요?
묵상 레시피
(사도행전 14:8-18)
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9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10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11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12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13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14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고린도전서 2:4)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어떤 일을 행했습니까? (8-10절)
- 그는 바울과 바나바를 어떤 존재로 오해했습니까? (11-12절)
- 바울과 바나바는 군중들에게 누구를 전합니까? (15-18절)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절)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만난 이는 똑같은 상황에서 무언가 얻기 위하여 제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곳에 있던 걷지 못한 사람은 바울과 바나바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바울은 그에게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을 보았다.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10절)
베드로, 요한이 오른손을 잡아 일으킨 것과 달리 바울은 큰 소리로 선포하여 치유한다. 바울은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임을 주변에 밝히 보이며 선포하고자 했을 것이다. ‘바로’ 일어나라는 의미는 ‘즉시’가 아니라 ‘곧게’, ‘똑바로’라는 뜻으로 두 발을 펴고 일어나라는 명령이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이에게 매우 황당한 명령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각 순종했고 일어섰고 걸었다.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라 하더라(12절)
이 지역에는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양으로 방문했으나 사람들이 맞아들이지 않아 홍수로 멸망시켰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전설이 재현되었다고 보고 바울과 바나바를 극진히 영접하려 하였다. 그들은 매우 영적인 사람들이었으나 동시에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었다. 바울은 자신을 신으로 떠받드는 일에 대해 전심으로 근심하며 슬픔을 표했으며(옷을 찢고, 소리 질러 14절), 한 분 하나님을 제시한다.
설교자의 자세
챔버스의 묵상 글을 읽다보면 종종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제로 아침 묵상을 준비하면서 몇 번 반복해서 읽고, 원문을 보며 비교하고, 인터넷에서 자료들을 찾으면서 이해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챔버스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의 설교가 쉽고 유머러스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 스터디 가이드]를 보니 실제로 어떤 성도는 “목사님의 유머와 마음을 푸근하게 하는 설교는 제 마음 밭을 쟁기질 하여 그곳에 씨를 뿌립니다. 저는 목사님 말씀에 진심으로 공감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챔버스는 뛰어난 언변과 유머를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교는 철저하게 복음을 전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과 챔버스의 근심이 서로 일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둘 다 말씀을 전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요?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 복음을 전하다가, 혹시라도 재능이 드러나고 복음이 가려지지는 않을까 염려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이 가슴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겸손한 척 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멋진 웅변으로 사람들을 감명시킨다면 ‘복음의 능력’이 가려지지 않겠습니까? 챔버스가 늘 강조하듯이 사역자는 자신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말이 허무한 구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데이비드 플랫의 [래디컬 투게더]에 보면, 재능으로 설교하는 사람의 전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아닌 재능을 자랑하는 것은 진정한 능력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경험한 어느 예배 때 일이다. 맨 앞줄에 앉아 초청 강사가 강단을 전후좌우로 누비며 설교하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인근에서는 누구라면 다 알 만큼 유명한 설교자여서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수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그런데 첫마디부터 수상쩍은 냄새가 났다.
“오늘 밤에는 깜박하고 성경을 안 가져왔군요.”
성경도 없이, 강사는 설교를 계속했다. 어떤 말씀을 전하길 원하시는지 알려 달라고 하나님께 며칠씩 기도했노라고 했다. 주변을 산책하고, 커피숍에 들어가고, 서재에 앉아 고민했던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워낙 재미있고, 재기발랄하며, 열정이 넘쳐서 잠시도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마무리할 때가 됐다. 강사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이랬다.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하시는지 알아내려고 갖은 수를 썼지만 심중에 떠오르는 게 없었습니다. 문득, 오늘 밤에는 주께서 특별히 전하실 말씀이 없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그러더니 마무리 기도를 하고 강단에서 내려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교회에서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시 없이 살 수 없다. 거룩한 자녀들은 항상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힘 있고, 권위가 넘치며, 명확하고, 단호하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얻으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 이미 주신 말씀을 그저 믿고 의지하는 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 말씀은 거룩한 백성들 사이에서 주님의 역사를 스스로 완성해 가신다.
오늘 말씀은 다분히 ‘설교자의 자세’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능력이 ‘복음’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믿습니까? 복음의 능력은 복음 전하는 자의 개성이나 능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복음 증거자의 진정한 금식은 음식이 아니라 자신을 멋지게 드러내려는 언변, 감명, 우아함 등, 하나님의 복음만이 제시되는 것에서부터 주위를 빼앗는 모든 것이어야 합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금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설교자가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하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또한 설교자들이 말씀을 전하기 전에 깊은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도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자신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진정한 자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설교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대언자’로 서있다는 자기의식입니다. 설교자는 오로지 복음을 제시하기 위해 그 단에 서 있습니다. 챔버스가 조금 무서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려는 설교자는 결국 예수님을 향한 반역자로 드러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을 드러내고, 재능을 발휘하려고 하면 할수록 복음의 ‘창조적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찬북뉴스>에서 루이스 앨런의 [설교자의 요리문답]을 읽고 쓴 방영민 목사(서현교회)의 서평을 보았습니다. ‘설교자의 자세’에 관한 좋은 내용이 있어 옮겨봅니다.
설교자는 단순히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다. 설교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은사가 있으며 말의 재주가 있다고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무엇보다 주님을 깊이 체험하고 경험한 흔적이 있어야 한다. 이 복되고 영광스러운 경험 없이 사역하고 설교한다는 것은 강단을 더럽히는 것이고 교회를 장사판으로 변질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신구약시대나 요즘이나 양의 문이 되신 예수를 통과하지 못하고 전하는 설교자가 있다는 것이다.
설교자에게는 언변과 비유와 논리와 수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설교자로서의 자질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다. 탁월한 은사를 가져도 교회를 위해 잠시 쓰임 받다 버려지는 설교자가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설교자는 자신에게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는 예수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지 보아야 한다. 이게 없다면 은사만으로 설교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은사와 관심과 특기 이전에 이 영광스러운 스티그마를 지녀야 할 것이고, 이것은 더 선명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