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
한 줄 노트
- 주님과 하나 됨이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붙들고 물러나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묵상질문
우리는 지금 주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혼자서 열심히 걷고 있습니까? 주님은 빨리 걷는 걸음보다 같이 걷는 걸음을 원하십니다.
묵상 레시피
(요나서 1:1-17)
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 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7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8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
9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10 자기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12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13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14 무리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고 구하오니 이 사람의 생명 때문에 우리를 멸망시키지 마옵소서 무죄한 피를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 여호와께서는 주의 뜻대로 행하심이니이다 하고
15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16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요한복음 6:67)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1-2절)
- 요나는 어떻게 반응하였습니까? (3절)
- 요나는 어떤 일을 만나게 되었습니까? (4절)
- ‘잠들어’있던 요나에게 선장은 무엇을 요청합니까? (6절)
- 요나와 사람들은 폭풍을 통해 무엇을 깨닫습니까? (9-10,14,16절)
- 요나는 결국 어디에 이르렀습니까? (17절)
- 하나님을 피해 물러나면 자꾸만 ‘내려갑니다.’ (3,5,15,17절)
다시스(3절)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그러나 그는 정 반대편의 다시스로 간다. 3절에는 ‘다시스’가 3번이나 등장한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완강하게 거부한 것이다.
요나는 니느웨에 대해 하나님과 다른 판단을 했다. 원수 국가인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심판 받아야 할 도시로 여긴 것이다(사10:12, 나3:1, 습2:13-15). 요나는 하나님의 ‘예언자’였다.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3절) (히)빠라흐
요나가 하나님의 면전을 떠나 멀리 달아난다는 뉘앙스이다. 요나는 하나님이 모든 곳에 존재하심을 잊고 ‘면전’에서 물러나 상황을 모면하려 한다. 히브리어 빠라흐는 은밀하게, 매우 서둘러 도망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내려갔더니(3절) (히)야라드
지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감. 3개 절에 총 4회 반복되어 사용된다. 욥바로 내려가고(3절), 배에 올랐고(3절, 원문에는 ‘내려갔다’로 되어 있다), 배 밑층으로 내려갔으며(5절), 바다에 빠져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산 뿌리까지 내려갔다(2:6). 그가 하나님을 피해 달아났을 때 점점 영적인 침체와 침륜을 경험한다.
깊이 잠이 든지라(5절) (히)라담
요나의 신앙과 정신 상태를 나타낸다.‘이방인’ 선장이 ‘하나님의 예언자’인 요나를 깨운다. 그는 요나를 ‘자는 자여’라 부른다.
짧은 기도
하나님 앞에 운명이 없음을 알게 하소서.
정해진 길도 없음을 알게 하소서.
지나온 길, 남이 걸어온 길이
내 길이 아님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이제 여기서 내가 내딛는 발걸음에서
길이 생겨남을 알게 하소서.
오직 님이 길이고
님과 함께 사는 삶이 길임을 알게 하소서.
박재순_님과 함께(신학자)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 96
‘물러남’ 즉 주님과 동행하지 않음
오늘 묵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말씀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6장은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주님께서 ‘생명의 떡’에 대하여 설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러자 주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런데 이 짧은 말씀이 제자들의 마음을 강하고 깊게 찔렀습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단순히 제자들의 선택을 묻는 것이 아니라, 떠나지 말고 굳건하게 말씀을 붙들라는 권면의 의미가 더 강하게 실려 있습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아주 흥미롭게 이 말씀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동행을 멈춘 것이지 죄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단지 주님으로부터 물러간 것입니다.”
‘물러났다’라는 말은 영어 단어의 ‘relapse’인데, 본래 의미가 ‘어떤 병이 재발하다’라는 뜻입니다. 원문의 뜻을 살린다면, 주님을 떠나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상태 정도로 해석해도 좋을 듯합니다. 챔버스는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주님을 위해 애쓰는 많은 크리스천들의 모습 가운데 이런 성향이 있는 듯합니다. 여러 가지 모습으로 수고하고 희생하지만 정작 주님과 동행하지 않는 상태 말입니다.
챔버스의 묵상 글을 읽다보면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열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와 함께 동행 하는 것이다! 1월 28일 묵상에서 말했던 것처럼,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우리의 열심은 오히려 주님을 아프게 하고, 더 나아가 주님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 물음에는 제자들이 주님과 언제나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 됨’은 거듭나서 거룩하게 된 성도들이 애써야 하는 영적 훈련입니다. 거듭남이 ‘출생’하는 것이라면, ‘하나 됨’은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은 [제자입니까]라는 책에서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제가 ‘만년 갓난아기 신자’라고 부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교회 가운데는 수년 동안 설교를 꼬박꼬박 들었는데도 처음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그들의 하나하나를 돌봐 주어야 합니다. -기저귀가 젖었는지 가끔 들춰보아야 하고, 토닥토닥 베이비파우더도 발라 주어야 하며, 우유가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볼에 대 보아야 하고-.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군병들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오늘날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군대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생아들로 가득 찬 산부인과 병원처럼 보입니다.
주님이 오늘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이 하나 됨을 유지하느냐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그 비결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직 주님께만 철저하게 헌신하십시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비결입니다.”
동행의 비결은 ‘자신의 무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어렸을 적, 운동회 때 하던 경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2인 3각’ 이 경기가 흥미진진한 것은 개인의 실력으로 판가름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개개인의 실력이 좋아도 호흡이 맞지 않으면 동행이 불가능합니다. 어쩌면 발을 내딛는 순간 넘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는 긴장감이 있습니다. ‘2인 3각’을 잘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보조를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하나 둘 하나 둘’ 외치며 어깨동무를 하고 뛰어가야 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완주하는 팀이 승리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고 완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정겹고 화기애애한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경기의 묘미는 끝까지 완주하는데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 말씀을 들으셨을 때, 주님의 표정이 화기애애하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베드로가 실패하고 실수하고 배신할 것도 아셨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려는 그 마음을 아셨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은 우리의 실력이나 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온전히 주님의 방법을 의지하려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문제는 답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었죠. 베드로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후에는 끝까지 주님과 동행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베드로가 오늘 말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그 분에게만 있음을 알 때, 우리는 그 분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사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