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 5:39
한 줄 노트
- 그리스도인이 받는 모독은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 주님의 제자는 ‘의무’를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묵상질문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주장하는 것은 마땅한 권리인가요, 주님과의 관계인가요?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16:21-27)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5:39)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 예수님께 일어날 일은 무엇입니까? (21절)
- 베드로의 반응과 생각은 어떠했습니까?(22절)
-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23-27절)
죽임을 당하고, 살아나야 할 것을(21절)
헬라어 ‘데이’가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 반드시 일어날 일을 가리킨다. ‘살아나야 할 것을’에도 헬라어의 신적 수동태가 사용되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킬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알고 계셨으며 받아들이셨다.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22절)
여기에 쓰인 헬라어‘에피티마오’는 ‘책망하다, 꾸짖다’는 뜻이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과 예수님께 일어날 일을 전적으로, 강하게 부정한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고, 인간적인 안전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은 사탄의 일이다(23절).
자기를 부인하고(24절)
‘부인하다’는 말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공언하다’라는 뜻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미 죽은 사람처럼 여기고 예수의 뒤를 좇아가는 것이 제자이다.
1. 세상과 다른 것
오늘 말씀은 6월 27일에 나누었던 묵상 ‘구원을 방해하는 먹구름’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날 우리는 사역자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강령을 배웠습니다. “결코 이 세상에서 공의를 구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여하신 공의를 끊임없이 베푸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공의를 구하는 자가 아니라 공의를 베푸는 자로 부르셨으니, 불의한 일에 당할 때 항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렇습니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도 말고, 오른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는 왼편도 돌려 대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모욕적인 일입니까? 세상적으로 볼 때 뺨을 맞고 상대방의 뺨을 치지 않으면 겁쟁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이 말씀을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아온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산상 수훈’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어떤 사람이 뺨을 맞고 같이 뺨을 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모독에 대처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모독을 당하는 순간에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가요? 고대 그리스의 노예들에게는 이런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는 따귀를 얻어맞느니 차라리 채찍에 맞아 죽는 편이 낫다.’ 노예에게도 뺨을 맞는 것이 그렇게 모욕적으로 느껴지는 것인데, 예수님 당시에 뺨을 맞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더 핑크의 [산상수훈 강해]에 보면 이 모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39절). 이 말씀에는 사람들의 몸에 가해진 모든 위해가 표현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말이나 행위로 뿐만 아니라 ‘오른편 뺨’이라는 말에서 암시되는 바, 인격에 대한 모욕까지도 포함된다. 보통 사람들은 오른손으로 치며 그러면 왼편 뺨이 맞게 된다. 그래서 오른편 뺨을 맞았다는 것은 의례히 손등으로 친 경우가 된다. 즉, 화가 나서 때린 것보다도 더 보복을 유발시키는 모욕적인 일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그 일격에 대응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아더 핑크는 ‘오른편 뺨을 맞는 것’이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극심한 모욕을 받는 상태임을 강조합니다. 보복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모독의 극심한 정도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모독이 극심할수록 주님의 향기는 짙어지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분이 당신 안에 계신지 아닌지가 문제입니다. 성도가 받는 모독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향기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을 흉내 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흉내 내려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 임재를 요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
산상수훈이 우리들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세상의 법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이것이 너의 의무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의 의무가 아닌 것을 하라’는 것입니다. .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만일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언제나 이와 같은 일들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우리가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의무’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말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고, 너무 억울해서 억장이 무너질 때,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면 또 한 번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으니, 우리도 누군가의 죄를 감당하고 용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챔버스는 이전에도 성도를 부르신 이유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기 위함’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독을 당하고 오해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참으면 그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 자신의 영광이나 결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억울한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를 그런 시선과 상황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주님과의 관계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스왈드 챔버스 기독교의 진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 마음과 힘을 다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 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든 상관하지 않게 됩니다. 누군가가 보고 있든 그렇지 않든 오직 하나님께 충성하고 다른 영혼들을 섬기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잠 3:5)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참 어려운 부분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새겨야 할 부분입니다. 결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언제나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그것입니다. 결코 자신을 위한 공의를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공의를 행하는 일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