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한 줄 노트
- 문제는 악행이나 부도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신’이 되어 자신을 실현하려는 경향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까? 아니면 당신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바꾸기를 원하십니까?
묵상 레시피
(로마서 5:12-17)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12절)
-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세상이 받게 된 선물은 무엇입니까? (15절)
- 아담과 예수님이 대응되는 존재인 듯, 차별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17절)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15절)
‘아담은 옛 시대, 사망의 시대의 머리이며, 그리스도는 새 시대 곧 생명의 시대의 머리이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수학적으로 대응되는 형태로 보인다(15절).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선물을 아담의 범죄와 대등한 수준에서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15-16절). 하나님은 죄로 인해 망가지고 황폐한 곳으로 직접 오셨으며, 그저 망가진 것을 복구한 것이 아니라 ‘더욱’ 훌륭하게 만드신 것이다(17절). 아담 이래로는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해서는 ‘생명이 왕 노릇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게 된 것이다(17절). 사망의 종노릇 하던 이들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존재, 하나님의 다스림에 참여하는 존재가 되었다.
죄를 바라보는 시각
오늘 묵상의 본래 제목은 ‘타락에 대한 편견’(The bias of degeneration)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신학 사상을 성경신학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이야기할 때 불만을 이야기하며 토론이 이어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한 사람이 죄 때문에 전 인류를 벌하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의 기질 곧 ‘자기 권리 주장’이 한 사람에 의해 전 인류에게 들어왔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챔버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죄론’은 ‘죄’와 ‘죄의 경향’을 분리하는 것 같습니다.
챔버스에 의하면 인류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것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야기된 ‘죄의 기질’로 인해 우리가 죄를 짓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죄가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기질이 유전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우리 속에 찾아온 이 죄의 기질을 어떻게 이기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기질이란 무엇일까요?
“죄의 성향은 부도덕이나 악행이 아니라 ‘나는 나 자신의 신’이라는 자기실현의 성향입니다. 이 성향은 예의 바른 도덕적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고, 버릇없는 부도덕한 행동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같은 근본 곧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바로 챔버스가 말하는 죄에 대한 편견이 아닐까요? 우리는 흔히 죄를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인간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는 경향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하는 죄의 모습은 그것이 실제적인 선인가 악인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의 근본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결해야하는 것은 바로 인간에게 유전되어 있는 죄의 성향인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이 부분에서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아실현은 현대인들의 표현이다. 현대인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 종교적인 사람이 되라. 당신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똑바로 서라”고 외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아실현에 근거하여 서 있는 선하고 흠 없는 인생이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멀리한다.
오늘날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의 외적인 죄가 아니라 자아실현을 원하는 이상들이다. 이러한 자아실현의 이상은 더욱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간들을 분리시키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그리스도 실현이 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도덕적으로 깨끗하고 고상한 사람들을 만나셔서 고쳐주신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내적 성향’이었습니다. 남을 돕는 선한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성취를 위해 행하는 것은 위선이요 자기 자랑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간음하는 죄를 지은 여인에 대하여도 ‘행위’보다는 그 행동을 하는 사람의 본성에 집중하시고 고쳐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으시는 죄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챔버스에 의하면,
“죄는 타고나는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속을 통해 죄를 다루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의 유전으로 저주 아래 놓인 전 인류를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디에서도 사람이 물려받은 죄의 유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요한복음 3장 19절 말씀이 이 부분을 명확히 합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 보면 ‘정죄’ 즉 ‘심판’이란, 우리가 죄를 가지고 태어난 것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이 오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을 거절하는 것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타락에 대한 편견’이란 분명합니다. 우리가 죄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거절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죄를 유전적으로 가지고 태어나 가능성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슬퍼하지 마시고, 죄의 기질을 가진 우리의 성향을 고치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하여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는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 것보다, 죄를 짓는 우리의 본성이 변하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가 쓴 [구원의 은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 서서, 말 한마디로 물이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면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이적일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성취할 자는 없다. 당신의 본성이 바뀐다면 나이아가라를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이적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욕망의 방향과 생의 흐름을 바꾸어, 당신의 전 존재가 그분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그분께 가까이 나아가도록 바꾸실 수 있다.
“죄는 타고나는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구속을 통해 죄를 다루십니다.”
구속의 은혜는 마치 나이아가라 폭포의 물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 이적입니다. 타고난 죄의 본성이 흐르는 우리의 존재 방향과 흐름을 하나님께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챔버스는 이와 같은 구속의 은혜를 우리가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