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해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한 줄 노트
-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유일한 이유는 순종과 헌신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대속의 사건 때문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그 놀라운 대속의 은혜를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으로 말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3:14-17)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하나님은 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15-17절)
- 예수님은 이를 위해 어떤 일을 겪게 되십니까? (14절 하반절)
- 예수님은 구약의 어떤 사건을 언급하십니까? (14절 상반절)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14절)
‘들려야(헬, 휩소데나이)’는 십자가에 들리는 것과 승천 모두를 포함한다(요8:28,12:32,34). 예수님은 이 일을 모세 시대의 놋 뱀 사건과 함께 언급하신다. 하나님은 불 뱀 재앙으로 죽게 된 이스라엘을 위해 불 뱀 형상의 놋 뱀을 세우게 하셨다(민 21:9). 둘 모두 죄로 죽게 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중대 조치이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5절)
‘영생’은 단순히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을 뜻하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요17:3, 롬 5:21). 이는 주님과의 교제로 현재에 주어지는 새 생명(요5:24, 요일1:1-3)과 마지막 날 하나님과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는 종말론적 구원 둘 다를 포함한다(요6:40, 요일2:17).
믿는 자마다(15절)
‘마다(헬, 파스)’는 ‘모든, 항상, 전부(행18:2, 마28:20, 마18:32)’와 같이 ‘모두 다’를 포함하는 ‘전체’의 의미와 더불어, ‘각양, 각종(롬7:8, 계9:4)’과 같이 ‘각각의 개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즉, 본문은 ‘예수를 믿는 자는 예외 없이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사실과 더불어,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믿는 자’에 쓰인 헬라어 피스튜온은 현재 시제로 계속된 동작이나 반복을 나타낸다. ‘구원에 이르는 진실한 믿음은 매일 매순간 삶의 전 과정에서 연속되는’것이다(마7:21).
대속의 의미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속’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동정심’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논리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곧 주님은 죄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사라집니다. 주님의 죽음은 하나님 아버지께 대한 주님의 순종의 결과이지 우리를 향한 동정심의 결과가 아닙니다.”
지난 며칠 동안 챔버스는 중요한 신학적인 주제들을 다뤘습니다. 오늘 구속에 대해서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시는 이유는 우리의 헌신이나 순종 때문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헌신이나 순종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헌신이나 순종은 ‘원인’이 아니라, 대속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대속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동정심’으로 주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 뿐 아니라, 주님이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오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지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대속의 결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이 사랑의 계시를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문장이 하나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대해 절대로 아버지를 보여주는 분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걸림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 22-24)”
가만히 이 부분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걸림돌’이 되실까요?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이미 선포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대속의 사건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이고, ‘나’는 바로 이 주님의 죽으심과 일치됨으로 죄로부터 구원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해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이야기를 하나 소개합니다. 강준민 목사가 쓴 [복음 받은 사람의 행복]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892년 미국의 조지 윌슨이라는 한 남자가 우체국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다 강도와 살인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유죄가 입증되어 결국은 교수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러자 주위 친구들이 그를 위해 탄원에 나섰고, 다행이 앤드류 잭슨 대통령으로부터 사면장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면됐다는 소식을 접한 윌슨은 죽겠다고 고집하면서 사면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담당 보안관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공식적으로 사면을 받았는데 자기가 원한다고 처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다시 잭슨 대통령에게 보고했습니다. 당혹스럽기는 대통령도 마찬가지여서 이 사건을 다시 미연방대법원으로 넘겼습니다. 그러자 대법원장 존 마샬은 다음과 같은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면은 한 장의 종이일 뿐이며, 그 종이의 가치는 전적으로 관계된 사람의 수락 여부에 달려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사면을 거절하는 것은 전례가 드물지만, 거절했다면 그것은 결코 사면이 아니다.”
그래서 조지 윌슨은 교수대에서 처형되었으며, 그에게 주어진 사면장은 불과 30여 미터 떨어진 보안관의 책상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능력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사면장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면장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으면,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담아 두신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해 죄를 삼으신 것’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조성되도록 결단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력이 내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구속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은혜의 사건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 안에서 그 구속의 은혜가 넘쳐흘러야 합니다. 아니,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우리 안에서 효력을 나타냄으로 우리는 이제 순종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의지를 오로지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