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롬 6:16
한 줄 노트
-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현관에 서있는 것입니다.
-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말고 진정한 주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의 삶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일은 무엇입니까? 주님 때문이 아니라, 혹시 주님을 향한 나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것은 아닐까요?
묵상 레시피
(출애굽기 4:20-26)
20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그가 백성을 보내 주지 아니하리니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 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로마서 6:16)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 모세에게 임한 당혹스러운 일은 무엇입니까? (24절)
- 모세의 아내 십보라의 긴급하고 빠른 대처는 무엇이었습니까? (25-26절)
- 이를 통해 모세는 무엇을 먼저 경험하고 있습니까? (23절, 용어설명 참고)
- 모세와 그의 가족들이 받은 훈련은 무엇입니까? (25절, 용어설명 참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돌아가거든… 길을 가다가(20, 21, 24절)
이 사건은 모세와 그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돌아가던 ‘길 위에서’ 당한 당혹스러운 일이다. 고사하던 모세를 강권하여 애굽으로 보내신 하나님이 이제는 모세를 ‘길 위에서’ 죽이려 하신다. 이 길는 모세와 가족들이 가야 할 ‘사명의 길’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모세와 가족들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찾아오셨다.
그의 발(25절)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들렸다(20절). 하나님은 이제 모세의 ‘발’을 준비시키신다. 발은 성기의 완곡한 표현이다. 모세는 할례의 피로 구별된다. 모세의 가족 모두가 이 일에 함께 헌신한다. 아내 십보라는 빠르고 과감한 결단으로 남편 모세의 죽음을 막아낸다. 모세의 아들은 포피를 내어준다. 모세와 그 가족은 죽음의 긴박함과 피 흘림을 통해 죽음이 넘어가는 구원을 ‘길 위에서’ 미리 경험한다(23절).
1. 주님이 낯설게 느껴질 때
오늘 묵상은 이전에 나누었던 ‘구름과 흑암’을 연상케 하는 내용입니다. 아직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는, ‘구름과 흑암’의 때를 지나야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과정을 ‘훈련’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오늘 제목이 ‘The discipline of dismay’라고 되어 있는데, ‘낭패 혹은 실망’을 통한 훈련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낭패감이 찾아올 때, 얼마나 당혹스럽습니까? 오늘 본문은 바로 제자들에게 찾아왔던 당혹스러움의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 당혹스러움은 낭패와 실망 가운데 찾아온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 마가복음 10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입니다. 3년이나 함께 공생애를 지냈던 제자들인데, 앞서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낯설게 느껴집니다. 낯설음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함께 살아왔던, 자신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죠. 여기에서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럼 진짜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조용히 묵상하는 중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낯설음’은 주님의 모습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이 생각했던 주님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의 생각과 달라서 주님이 낯설게 여겨진다면, 우리가 주님을 잘못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챔버스는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이해하고 있다고 확신했으나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우리 사이에 큰 거리가 있음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주님과 친근감을 느낄 수 없고 그분은 저만치 앞서 가십니다. 그리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그동안 우리가 주님을 친숙하게 느끼고 있었다면, 내가 원하던 주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시 우리들에게도 이런 당혹스런 순간이 찾아왔나요? 주님이 낯설게 느껴지고, 더 이상 나에게 친절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순간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객이 전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믿었지만, 사실은 주님이 나를 섬겨주시고, 주님이 내 뜻에 맞춰주시고, 주님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져주시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우리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살아가면서 ‘낯선 하나님’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큰 고난으로 힘들 때, 너무 오래 지속되는 고난에 지칠 때, 지금까지 알고 있던 하나님이 아닌 낯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하면 어떤 분이라는 나름대로의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낯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되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새로운 눈이 뜨이는 순간입니다.
2. ‘당혹스러움’이라는 훈련
‘당혹스러움’이 찾아오는 것이 훈련의 시간이라면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훈련의 시간을 잘 이겨내면 얻는 것이 있고, 또한 이 시간에 넘어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당혹스러움의 정체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들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일, 아니 우리가 알고 싶지도 경험해보고 싶지도 않던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모든 죄악과 슬픔을 다 경험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를 무척 당혹스럽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승리와 영광중에 오시는 주님이신데,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셔야 한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제자의 삶이라면, 우리도 주님과 같이 십자가의 길을 걸아가야 하는데, 도저히 그 길에서 주님과 친밀함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챔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의 길에서 당혹스러움의 훈련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제자의 길 가운데 위험은 자신의 작은 열정에 묻혀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을 찾아왔던 한 부자 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자신의 열심을 가지고 율법을 지키며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주님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 고 말씀하셨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요? 자신의 최선이, 최선이 아님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니 말입니다. 오늘 챔버스는 이렇게 찾아오는 ‘당혹스러움’이 우리들에게 훈련이 된다고 말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부자 청년은 훈련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고 주님을 떠나갔습니다. 훈련의 시간은 견뎌내야 하는 것입니다. 버거운 훈련의 시간이 찾아올 때는,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주님을 따르는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