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고후 5:9
한 줄 노트
- 무엇을 위해 수고하는지 정기적으로 점검하는 사람은 헛된 수고를 하지 않는 지혜로운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 홀로서서 하나님과 오롯이 마주하는 긴장감이 살아있을 때, 진정한 소망의 가치가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묵상질문
당신에게 있어 홀로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은 언제인가요? 홀로 있을 때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으신가요?
묵상 레시피
(고린도후서 5:10)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예수님께서 바쁜 사역 중에도 지키신 시간과 일은 무엇입니까? (눅5:15-16)
- 예수님은 전도여행 전에 무엇을 하셨습니까? (막1:35)
- 예수님은 호시탐탐 공격하는 이들을 만나기에 앞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요8:1)
- 예수님은 죽음을 준비하며 무엇을 하셨습니까? (눅9:18)
- 예수님은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이루기에 앞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마26:36)
- 믿음의 사람들이 구별하여 지킨 일은 무엇이었습니까?(시5:3,143:8, 행9:11,10:2, 롬12:12)
각 구절의 앞 뒤 문맥을 살피며 묵상해 보십시오.
1. 무엇을 위해 수고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점검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애쓰느냐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죽으나 사나’ 애쓰는 것이 있다는 것이죠. 헛된 수고만큼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불림을 받아 해야만 되는 수고는 어떤 것일까요?
“우리 삶이 실패하는 이유는 영적 경험의 결핍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이상을 항상 유지하려는 수고의 결핍 때문입니다.”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은 ‘야망’입니다. 똑같이 하는 일이 진정한 수고가 될 수도, 야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 교회를 부흥시키는 일 등은 참 좋은 일이지만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단지 야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영적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영적체험도 주님께서 주신 이상을 유지하는 것과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 될 때,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과 야망으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사도 바울의 ‘태도’를 모범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사역에 있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아주 좋은 표현인 것 같습니다. 훌륭한 연주가는 청중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기 보다는 자신을 가르친 스승의 인정을 받는 것에 더 신경을 씁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역을 한다면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 비전이 잘못되지 않도록 챔버스가 제안하는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주님이 원하시는 그 기준에 따라 사는지 지난 삶을 점검하십시오.”
우리의 삶을 복되게 만드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정기적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성찰하는 것입니다. 이 점검의 시간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과 관계없는 야망의 뿌리를 뽑는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을 가능케 하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어릴 적 운동장에 모이면 선생님이 한 학생을 지목하면서 ‘기준!’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보세요. 지목을 당한 그 학생은 오른손을 높이 들면서 ‘기준!’이라고 외치죠. 그러면 주변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기준’을 중심으로 오와 열을 맞춥니다. 그런 상상을 해보세요.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선생님이 ‘줄 맞춰!’라고 했다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요? 아주 중요한 교훈이죠. 줄을 맞추고 싶지만 기준이 없다면, 우리가 노력을 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헛된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정기적으로 ‘기준’을 점검하는 것이 우리 신앙에 무척 유익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진정한 가치의 증명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가장 중요한 것 딱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주저하지 않고 다음 문장을 꼽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공적인 가치는 내가 홀로 있을 때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의 수고가 야망으로 흐를까요?하나님께만 인정받으려는 진실한 마음이 빗나가면,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아 만족을 추구하려는 야망이 생깁니다. 어찌 보면 인간의 본능인 ‘인정의 욕구’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겠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인생이 되면, 인정의 욕구에 굶주리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기준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주제에서 ‘기준’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이 두 번째 주제에서는 그 기준이 올바른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의 기준’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준의 기준’이란 무엇일까요?
또 이런 예를 생각해 봐도 좋겠습니다. 목수가 일을 할 때, 나무를 일정한 규격으로 여러 개를 잘라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준이 되는 첫 번째 나무를 자로 정확하게 재서 자른 다음, 그 나무에 맞춰서 다른 나무들을 자를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나무가 정확하면, 그 다음 나무들 역시 자로 잰 듯이 반듯하게 잘릴 것입니다. 적용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수고가 진정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하나님만 생각한다’고 하지만, 그 사역이 이루어지는 현장은 사람들과 함께 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인데, “우리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하지만, 그것이 증명되는 것은 늘 사람들 앞에서입니다.” 챔버스는 ‘홀로 있을 때’의 모습이 진정한 ‘공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 우리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숨기며 위선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하나님과 홀로 있을 때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홀로 있을 때’가 바로 ‘기준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홀로 있을 때’는 어떤 의미일까요? 홀로 있을 때에 우리가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들의 평판에서 떨어져 나와 하나님과 마주하는 자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오로지 홀로 서야 온전히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늘 경계하고 두려워했던 것을 챔버스 역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