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 42:10
한 줄 노트
- 우리에게 행하신 구속의 사건을 확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구속은 우리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중보 기도를 통해 더 깊은 영적 세계를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환경이 중보 기도의 유무를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묵상질문
중보 기도를 가로막는 환경의 목록을 적어봅시다.
주님은 그 환경들 가운데서도 중보 기도를 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묵상 레시피
(창세기 18:16-33)
16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22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27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28 오십 의인 중에 오 명이 부족하다면 그 오 명이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온 성읍을 멸하시리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29 아브라함이 또 아뢰어 이르되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사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욥기 42:10)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17절)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기대하셨습니까? (18-19절)
-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알려주십니까? (20-21절)
-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어떤 역할로 서게 됩니까? (23절)
-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몇 번에 걸쳐 의견을 아룁니까?(24-32절)
- 하나님의 기대와(18절) 아브라함의 중보사역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17절)
‘이르시되(히, 아마르)’는 보통 ‘말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상황에 따라 ‘생각하다’, ‘의도하다’로 번역된다(창17:17, 출2:14). 하나님의 독백은 아브라함에 대한 신뢰로 시작된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23절)
아브라함은 중재자로서 하나님과 대면해 있다. ‘가까이(히, 나가쉬)’는 어떤 목적으로 ‘가까이 가다’, ‘접근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 다가갔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친밀함을 나타낸다. 친밀함은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는 것과도 관련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앎과 친밀함을 중보의 근거로 삼는다. 친밀함을 내세워 개인의 영달을 간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에 호소하여 영혼들을 위해 중보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인 소돔 사람들을 위해 중보 한다.
1. 주님에 대한 모독
오늘 본문의 내용은 3월 30일에 다루었던 ‘중보 기도’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중보 기도는 우리가 얼마나 선한 존재인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보 기도는 다른 사람의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을 통해서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정화시켜 달라’고 기도한다면, 기도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구속해 주셨고 깨끗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속죄에 대한 불신앙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 많은 기도를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구원은 완성된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그 일을 또 하시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를 향한 모독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 받고 깨끗해지는 것은 우리의 노력 덕분이 아니라 전적인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깨끗해지기 위해 자꾸 무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고,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가 아직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완전하게 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유일한 길은 주님께서 행하신 속죄의 사건을 절대적인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 중에 ‘만세 반석 열리니’(494장)가 있습니다. 유명한 성직자요 찬송가 작사자인 어거스터스 토플레디는 이 찬송에서 사도 바울의 감격스런 감정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1.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창에 허리 상하여 물과 피를 흘린 것 내게 효험 되어서 정결하게 하소서
2.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쉼이 없이 힘쓰고 눈물 근심 많으나 구속 못할 죄인을 예수 홀로 속하네
3.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4. 살아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절대적인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모든 요청을 내려놓고 모든 노력을 멈추십시오.”
이 놀라운 사실을 믿고 고백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것’은 이러한 행위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행하신 일을 미심쩍어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내용을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기도한다면서 실은 주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2. 친구를 위한 기도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 기도는 명백합니다. 우리의 선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우리를 선하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중보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 주변에 아직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중보 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기 42장 10절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욥의 곤경을 돌이키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정작 욥 자신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중보 기도’는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 속죄의 은총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속죄의 은혜가 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아직 백배의 결실을 얻지 못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깨달음이 없다면 친구들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중보 기도는 우리의 환경이 완벽하게 조성되었거나, 우리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중보 기도는 오직 받은 은혜로 말미암아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곤경을 돌이키십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깊은 영적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중보 기도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 깊은 영적 관계로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의 책 [세상을 끌어안는 중보기도 파티]에 보면, 중보 기도의 유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이타적인 기도입니다. 남을 위해, 이웃을 위해 하는 기도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을 위한 기도의 측면도 놓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보기도의 핵심 가치는 이웃을 위한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는 본회퍼를 히틀러와 투쟁한 민주 투사로만 기억하지만 사실 놀랍게도 그는 아주 깊은 영성의 세계를 지녔던 사람입니다. 공동체와 기도의 영성을 강조했던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보기도란 개인과 공동체가 날마다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목욕과 같다.”목욕이나 샤워를 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시원하지 않습니까?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영혼들을 쏟아 붓고 기도하다 보면 우리 마음에 거룩한 쾌감이 찾아듭니다. 중보기도는 바로 마음의 깨끗함과 회복이라는 축복을 우리에게 선물합니다. 중보기도 사역이란 무엇일까요? 중보기도 사역은 주님이 친히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사역입니다.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같이하자고, 더불어 하자고 우리를 초청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사역이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 사역은 성도들이 첫째로 감당해야 할 사역입니다. 중보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