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
한 줄 노트
- 온전히 주님을 믿고 의지할 때 완전한 가난뱅이가 되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은 남을 의식하지도 않고, 남에게 의식되지도 않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스며듭니다.
묵상질문
사람들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있습니까? 위선적이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식해서 하는 행동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점검하십시오.
묵상 레시피
(고린도전서 2:9-16)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마태복음 5: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는 기관은 어디입니까? (9절)
- 하나님이 새롭게 열어주신 인식의 문은 무엇입니까? (10절)
- 하나님의 일은 무엇으로만 알 수 있습니까? (11,13-14,16절)
- 영적인 사람이 지닌 자유는 무엇입니까? (15절)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1절)
사람과 하나님, 사람의 영과 하나님의영, 사람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서로 대비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할 때에만 그분을 알 수 있다(요1:18).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12절).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서 인식 활동을 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은 하나님의 영,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것들을 깨달을 수 있다. 인간으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인식론적 한계가 성령으로 인해 열리는 것이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신령한 자’, 즉 영적인 사람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의 말씀, 성령을 통해 인식하고 판단하며, 이로써 자신의 삶을 규정해 나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람의 판단, 특별히 성령 받지 않은 사람들의 판단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영적인 사람이 누리는 자유이다. 세상과 동떨어진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진정으로 ‘신령한 자’라면 영적이고 성숙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16절)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인식할 수 없다. 그러나 성도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들, 성령에 속한 사람들(10절)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선언이다.
1. 완전한 가난
성경 말씀과 우리가 믿고자 하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우리의 의지력이나 인격의 아름다움을 강조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죠.
“우리가 자주 듣는 문구인 ‘예수 그리스도를 돕기 위해 결단하세요’라는 말은 주님께서 절대로 원하지 않으시는 내용을 강조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항복하라고 하셨고, 주를 돕기 위해 결단하도록 요구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까요? 왜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우리의 의지력이나 인격적 아름다움 같은 것을 자랑할 수 없을 때, 오로지 주님께 가난한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들어갈 수 없음을 절실하게 깨닫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것을 ‘항복’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일을 주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힘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노력이 우리를 무척 곤고하게 만들 것입니다.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에 헌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반면 우리가 주님께 가난함을 고백할 때, 동시에 온전히 은혜를 요청합니다. 그때 은혜를 누리는 삶이 시작됩니다.
오늘 묵상 글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완전한 가난을 향해 나아가는 만큼 우리의 신앙이 온전해지고, 주님과 친밀해 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2. 의식하지 않는 상태
챔버스는 오늘 묵상에서 요한복음 7장 38절 “나를 믿는 자는 …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는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생수의 양을 검사하고 있다면 주님의 손길을 놓치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말하는 고귀한 신앙의 단계는 의식하지 않고 행하는 단계입니다. 만일 남에게 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면 교만한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나는 유용한 존재인가’를 생각한다면, 주님의 손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묵상에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정상인데, 이렇게 말하니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눈에 띄지 않고 절대로 의식되지 않습니다. 만일 의식된다면 이는 예수님의 손길의 특성인 순수한 아름다움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이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질책하셨던 바리새인들은 늘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고, 자신을 드러내려고 시도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한다면 스스로 드러낼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속마음을 다 아시는 분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의 신앙을 알아주기 원한다면, 외적으로 어떻게든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자랑하거나 과장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사람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람들이 알아줄 때와 알아주지 못할 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눈에 띄는 특별한 일들에 더욱 신경 쓰려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신앙생활을 한다면, 평범한 일상 가운데서 의미를 찾고, 영적인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챔버스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장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스스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의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눈에 띄지 않고 절대로 의식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은 스스로 “나는 영향력이 있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스스로를 과장하거나, 자아가 팽창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은 눈에 띄지 않고 의식되지 않지만, 인격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진짜 영향력이 드러납니다.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연습]에 보면 자신을 드러내려는 의식이 없어도 일상에서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로렌스 형제는 천성적으로 부엌일을 굉장히 싫어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친숙해지게 되었으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기 일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부엌에 배치되어 섬겼던 15년 동안 부엌일이 너무 쉬워졌다고 말했습니다. …
로렌스 형제에게는 수도원에서 기도하라고 정해놓은 시간이 다른 일과시간이랑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 영적인 피정을 떠나 기도에 전념하라고 명령하면 순순히 따르기는 했지만, 따로 기도시간을 갈망하거나 일부러 요청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분주한 일을 감당하고 있더라도 온통 하나님께만 몰두하는 상태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섬김은 평범하고 순수하며, 무의식적인 일상에서의 섬김이 아닐까요? 챔버스의 묵상 글을 보면서 로렌스 형제가 떠올랐습니다. 부엌일을 섬기는 그의 모습과 작은 자에게 한, 아주 보잘 것 없는 섬김이 평범한 것들을 통해 영적인 일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바탕에는 평범한 것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아름다운 성품은 언제나 무의식적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