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섰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막 9:2
한 줄 노트
- 변화산은 내려오기 위해 올라가는 곳이요, 은혜를 받는 것은 은혜 받은 자로 살기 위함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에게는 변화산의 체험이 있나요? 그 체험이 변화산 아래서 역사하고 있나요? 당신의 인격이 이 세상에서 성장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묵상 레시피
(마태복음 17:1-5)
1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
4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마가복음 9:2)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 변화산 사건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1절)
- 예수님은 누구와 함께 산에 오르셨습니까? (1절)
- 제자들은 어떤 상황을 목격하게 되었습니까? (2-3절)
- 베드로가 한 말과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4절)
- 구름 속에서 들려온 소리는 무엇입니까? (5절)
엿새 후에(1절)
변화산 사건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일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16:13-28절). 베드로의 고백 후 예수님은 처음으로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고하신다. 그 일이 있은 지 엿새 후의 변화산 사건은 앞선 수난 예고와 연관된다. 예수님은 특정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 오르신다. 이는 친밀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특별히 가르칠 것이 있음을 나타낸다. 누가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기도’하셨다고 기록한다(9:28-29). 예수님은 기도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대비하고 훈련하게 하신다.
변형되사(2절)
‘변형되다(헬, 메테모르포데)’는 단순한 외적 변화(빌2:8)가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진행되는 영적인 변화(고후3:18, 롬12:2), 외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내적 성질’ 전체를 포함한다(출34:29). 예수님은 육신을 입으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다. ‘변형’은 이러한 예수님의 ‘죄 없는 내면의 본질적 영광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다. 이는 성육신 이전에 예수님이 가지셨던 신적 영광이다(요1:14,17:5, 빌2:6-7).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3절)
두 사람은 구약의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들과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의 율법, 예언과 연속선상에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 그것이 완성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4절)
‘있는 것이(헬,에이나이)’는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동작을 의미한다. 베드로는 ‘산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 없었으며 계속 산 위에 머물고’ 싶었던 것이다. 베드로는 초막 지을 것을 제안한다. ‘초막(헬, 스케네)은 나뭇가지, 막대기를 세우고 지푸라기, 나뭇잎, 가죽 등으로 벽을 두른 간이 주택이다.’ 초막절에 사용하던 임시 거처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즉, 베드로는 계속 머물 수 없다면 곧 있을 초막절만이라도 이곳에서 보내자며 황홀한 순간을 연장하려 한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5절)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고했듯 이제 산에서 내려가 예루살렘으로 향하셔야 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날 일을 명확히 듣고 그 길을 따라야 한다.
변화산으로 데려가신 이유는
오늘부터 3일 동안 마가복음 9장 말씀을 가지고 동일한 부제로 붙여진 ‘sphere’ (영역)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영광의 영역’ 내일은 ‘겸손의 영역’ 그리고 모레는 ‘사역의 영역’에 대하여 나누게 될 것입니다.
변화산 체험은 챔버스가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던 내용입니다. 이 세 명의 제자들처럼 우리도 영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머물렀던 때가 있습니다.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았고 제자들처럼, 거기에 머물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변화산 정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영적인 자리는 우리에게 ‘시험’(test)이 됩니다. 이 말은 영적인 체험을 통해 우리가 성장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시험이 있다는 말입니다. 챔버스는 이렇게 말하죠.
“우리의 영적 삶의 시험은 내려올 줄 아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영광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내려올 때입니다. 왜 ‘내려옴’이 시험이 될까요? 이 말의 의미는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변화산의 영광스러운 체험을 하게 하시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변화산 정상에 머무는 것도 위대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곳에 이르게 되는 이유는, 이 마귀로 가득 찬 세상에 내려와 이 세상의 사람들을 영적으로 들어올리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변화산에 올라간 이유를 명확히 알면, 왜 우리가 변화산에서 내려와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표현에 의하면 ‘우선순위’와 ‘목적’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영적 체험은 우리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변화산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변화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체험에 머물라고 우리를 데려가신 것이 아니라, 다시 계곡으로 내려가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변화산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증명되고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챔버스는 변화산에 머물려는 마음을 ‘영적 이기심’이라고 말합니다. 천사처럼 말하고 천사처럼 살기를 원하는 것이 영적 이기심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특별한 시간’을 영원처럼 붙들고 있으려고 한다면 정상적인 삶으로 부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영적 체험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 체험을 하고 난 후, 세상으로 내려가신 주님과 함께 동행 하지 못한다면 그 영적 체험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크리스천투데이 [손종국의 청소년 교육 칼럼]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선교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분이 남미 산악지대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선교를 시작했는데, 이 원주민들이 산악지대에서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이 사람들을 잘 훈련시키면 육상대회에서 금메달은 문제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들이 사는 지역은 평평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얼마가 지난 후, 그 지역에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있도록 산을 깎아서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 넓은 운동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을 데려다가 달리기를 시켜보았더니 최고 기록이 23초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산악지대에서만 훈련받아서 평지를 달리는 근육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신앙도 특별한 기간에만 잘한다고 해서 좋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신앙은 평소의 삶에서 잘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련회 때 아무리 잘하였어도 일상생활에 돌아와서 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신앙일 수밖에 없다.
청소년수련회는 매우 뜨겁습니다. 열광적인 찬양과 말씀을 은혜 받는 학생들을 보면 마치 변화산 정상에서 큰 영적체험을 경험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짧은 수련회 기간이 끝나고 내려오면, 그들의 삶은 영적체험이 무색하리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 이런 질문을 던져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변화산에서 얻는 유익은 무엇이고, 이 세상으로 내려와 얻는 유익은 무엇인가?
우리는 변화산 정상에서의 체험, 해 돋는 새벽,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 등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오직 영감을 얻기 위한 순간들일 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계곡’을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유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영적인 체험이 이 세상에서의 경험보다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들이 있지만, 영적체험과 비교한다면 유익이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중요한 것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산 위의 정상은 우리에게 뭔가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뭔가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영적 체험의 시간에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새롭게 변화된 우리가 세상으로 내려와 여러 가지 일들을 맞닥뜨리게 되고, 그러한 경험 속에서 점차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산이 우리들에게 귀한 ‘영적 체험’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드문 영적 체험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내려올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묵상이 진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은혜 받는 시간’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를 가슴에 품고 세상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주지 못한다면, 그 은혜는 단순히 허상에 불과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