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몸은. . .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 19
한 줄 노트
- 가장 고귀한 인생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입니다.
- 고난이 축복임을 깨닫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입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을 아프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묵상 레시피
(시편 1:1-4)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고린도전서 6:19)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 악인들, 죄인들, 오만한 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절)
-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절)
- 복 있는 사람은 무엇에 비유되며,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3절)
- 악인들은 무엇에 비유되며, 어떤 모습을 보입니까? (4절)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1절)
악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형통’하려는 모략(히, 빠아차트, 꾀)을 꾀한다. 죄인들의 길은 늘 하나님이 설정하신 방향을 빗나간다(히, 핫타). 죄인의 길에 ‘선다’는 것은 발을 깊이 들여 돌이키기 힘든 상태를 말한다. 오만한 자들은 악인이나 죄인보다 더 적극적으로 죄 짓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공의를 조롱하며,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을 비웃는 자들’이다. 그러한 자리에 ‘앉는다(히, 야솨브)’고 하는 것은 꾀를 좇거나, 길에 서는 것보다 더 강력한 의미로 ‘온갖 악에 깊이 침잠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즉 그들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상반되게 악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자들이다.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도다(2절)
시편 1편은 서시(序詩)로서 시편 전체의 주제와 핵심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까이 하고 순종하는 삶은 행복과 형통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율법을 멀리하고 죄악을 도모하는 악한 이들에게는 결국 패망이 기다린다.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하루 종일, 일생 동안’ 입으로 말씀을 외우고, 마음에 새기며, 그대로 산다는 의미이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3절)
팔레스타인은 건기와 우기가 뚜렷이 구분되는 지역이다. 대부분의 시내는 우기에만 물이 흐르고 건기에 말라버리는 간헐천이다. 3절에 언급된 시내(히, 팔르게 마임)는 항상 물이 흐르는 ‘인공적인 관개 수로’를 가리킨다. 사시사철 물이 풍성한 시내에 뿌리를 내린 나무는 ‘형통하다(히, 야츨리아흐).’ 이는 ‘거칠 것 없이 앞으로 돌진하는 모양을 나타내는 단어로(창24:40), 앞길이 평탄하고 형통하며 번성하는 것에 관계된 모든 것’ 즉, 세속적인 복과 영적인 복 모두를 의미한다. 한편, ‘심은 나무’에 쓰인 히브리어 ‘샤툴’은 이 나무가 척박한 땅에서 ‘옮겨 심겨진 나무’임을 나타낸다. 율법을 묵상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는 새로이 심긴다. ‘잎사귀의 생명 기운이 마르지 않는 영생의 세계(에덴 동산과 같은 세계)로 옮겨지는 복을 받는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으므로 세찬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않는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절)
‘겨(히, 모츠)’는 시냇가에 견고히 옮겨 심기운 나무와 상반되는 이미지다. 약한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버린다. 이 단어는 알맹이 없이 껍질만 있는 쭉정이를 가리키기도 한다(욥21:18, 호13:3). ‘바람(히, 루아흐)’은 다양한 의미로 읽히지만 여기서는 쭉정이의 정체를 밝히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볼 수 있다.
1. 부름 받음의 의미
오늘 묵상은 우리가 읽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챔버스처럼 치열하게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그런 삶이 가능할지 의문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챔버스의 글이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교제를 가지면서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안에서 사귐을 가지게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 속에 또 다른 세상’과 같은 사생활이란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는 순간, 사생활은 존재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야 하니 말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주님은 우리의 사생활을 깨뜨려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것이 되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면, 우리를 통해 세상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A. W. 토저의 책 [능력]에 나오는 글을 보면, 부름 받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회심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 결과, 대개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받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거라는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마 어떤 상담자는 그가 지금 영생을 갖게 되었으며, 그리고 주가 오시기 전에 죽는다면 분명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기 전에 승리 속에 그를 데려가실 것이라고 일러 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급히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뒤에는 더 이상 말해 줄 것이 없다. 그런 식으로 회심한 사람은 망치와 톱을 가지고도 그것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설계도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건물을 만들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주일마다 나와 연장을 갈아 놓고, 집에 돌아가서는 그것을 주머니에 넣어 두는 구태의연한 신앙생활을 반복한다.
챔버스가 여러 번 강조했던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도구’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나를 거룩하게 하려는 목적은 이기적인 것입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신앙의 목적이라면, 우리가 기꺼이 신발털이개가 되어 쓰임 받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복음의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기꺼이 찢겨지는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삶에는 자신의 인생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에게 관계된 일에만 신경을 쓰고 자신의 일만 하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이 복음의 장애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생활이 없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라, 가장 고귀한 하나님의 계획에 쓰임 받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실 때 진정 가치 있는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마음껏 우리의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이라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2. 주님께 뿌리를 두기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반석이신 주님께 우리의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름을 받을 때, 삶에는 고통이 찾아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 깨져야 하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석이신 주님께 뿌리를 두고 있으면 어떤 일이 발생해도 참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인생의 목적은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주님께 뿌리를 두지 못한 사람들은 삶의 고통이 찾아올 때 대부분 쓰러지고 맙니다. 챔버스가 자주 사용하는 ‘자기 연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통이 찾아올 때 자기 연민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스스로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여길 때, 영적으로 죽어갑니다. 더욱 무서운 것 중 하나는 성도의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연민에 빠진 사람들을 동정하여 그들의 영적 죽음을 돕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깨어지는 고통 가운데서 우리를 붙드시고 살리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60장 1절에 보면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통을 당할 때는 우리가 일어나야 할 때이고, 빛을 발해야 할 때이고,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는 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의 삶에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피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챔버스의 권면을 기억하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고통 받은 마음을 통해 주의 목적을 이 땅에 이루신다면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헨리 나우웬의 [예수의 길]에 보면 오늘 묵상의 의미가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 문장이 있다. 예수님의 아주 중요한 말씀으로 요한복음에 나온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예수님은 십자가에 들리셨고 부활을 통해서도 들리셨다. 이 말씀은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 모든 사람도 함께 들렸다는 뜻이다. 온 인류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속으로 이끄셨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의 죽음과 상처와 질병과 아픔과 혼돈과 고뇌와 외로움이 그분의 죽음 속에서 받아들여졌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