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마 26:40
한 줄 노트
- 나를 위해 깨어 계신 주님만 바라지 말고, 주님과 함께 깨어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 성령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의 인도하심이 없을 때 우리가 자의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의 삶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며 가르치신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묵상 레시피
(고린도후서 3:12-18)
12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마태복음 26:40)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 바울은 옛 언약(율법) 아래 있음을 무엇에 비유했습니까? (13-15절)
- 그것은 무엇으로만 벗겨질 수 있습니까? (16절)
- 그 때에 성도들이 경험할 일은 무엇입니까? (17-18절)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15절)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다(출34:29). 모세는 하나님을 뵐 때나 하나님의 명령을 전할 때 수건을 벗었다가, 그 외에는 수건을 다시 덮었다. 바울은 모세가 수건을 덮은 것은 ‘나타난 영광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13절). 산 위에서(출24:15-18), 중재자 모세의 얼굴로(출34:29-35), 하나님의 장막으로(출40:34-38)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시선이 이동한다. 바울은 결국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연결되어 성취, 완성되었다고 보았다(14절). 유대인들은 여전히 ‘모세’의 수건으로 덮여 있다. 하나님의 뜻과 구원의 역사가 그리스도로 나타났으나 완고한 마음으로 외면한다. 여전히 자신의 열심으로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고자 애쓴다. 모세가 ‘하나님’을 뵈올 때 수건을 벗었듯이, 이제 ‘그리스도’ 앞에서 수건을 벗어야 한다(16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17절)
그들이 옛 언약, 율법아래 있을 때에는 아들이 아니라 종이었다. 하나님을 ‘위해’ 신실함으로 계명을 준수하고자 애썼으나 결국은 죄 뿐이었다(롬7:22-25).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통해,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자유를 맛본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열매를 많이 맺는 삶이다(요15:5). 하나님과 ‘함께’인 삶인 것이다.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께 연결되어 있는 우리는 수건을 벗고 주의 영광을 분명히 보게 된다.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18절). 성령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을 안다(롬12:2).
1. ‘함께’가 어려운 이유
[주님은 나의 최고봉] 편집자인 비디의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9월 3,4,5일 묵상은 한 세트로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3일 묵상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희생’, 4일 묵상은 주님과 온전히 ‘하나’되는 진정한 사역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묵상에서는 그 모든 일을 이루기 위해 깨어 있으라는 권면입니다.
오늘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함께 깨어서 기도하자’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십자가를 앞에 둔 상황에서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했을까요? 챔버스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후 처음 단계에서는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않고 주를 ‘위해’ 깨어 있을 뿐입니다.”
원문을 보면 ‘함께’는 ‘watch with’, ‘위해’는 ‘watch for’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요? 처음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을 때는 ‘주님을 기대하며 깨어 있다’(watch for Him)는 것입니다. 아직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그리스도인은 단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깨어서 기도할 뿐입니다. 모든 순간과 상황들 가운데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는 않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했던 이유는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주님과 함께 깨어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와 함께 깨어 계신 것에는 익숙하지만, 우리가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용규 선교사가 쓴 [더 내려 놓음]에 나오는 글이 오늘 묵상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는가? 힘들어도 끝까지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삶 가운데 이것만은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막는 영역들이 무엇인지 헤아려보자. 예수님의 발치에 까지 가지고 나갔지만 더는 깨뜨리지 못한 채 여전히 두 손에 꽉 틀어쥐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저는 깨어지기 싫습니다. 상처받기 싫습니다. 내 체면도 좀 생각해주세요. 나도 영광을 같이 받고 싶습니다. 나도 적당히 같이 누리면 안 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히 말씀하신다.
“네 안에 네가 너무 크면 내가 들어갈 수 없단다.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구나.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나 네 안에 네가 너무 커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네 것을 달라는 이유는 네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너를 온전케 하려면 네가 잡고 있는 그것을 깨뜨려야 한단다. 네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데 네가 그것을 끝까지 잡고 있으니 줄 수 없는 거란다.”
우리 안에 혹시 하나님조차 들어갈 수 없는 영역이 있는가? 이 영역 안으로 주님을 초청하라. 주님이 내 의식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셔서 나의 주관자가 되어주셔야 한다.
2. 성령이 함께 하셔야
제자들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한계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고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 그들은 동산에서 잠들어 있었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의지나 본성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제자들은 오순절 강림 사건 이후에 깨어서 주님께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 4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
여기에서 ‘그들’은 주님을 버리고 떠났던 ‘그들’과 동일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이 남은 생애 주님과 함께 깨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오늘 묵상의 원문 제목은 “The missionary watching”입니다. 선교사로 부름 받기 위해서는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임재를 통해 주님과 함께 깨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을 때 우리는 자의적으로 생각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의 한계를 넘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요한복음 14장 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찰스 스탠리가 쓴 [변화를 이끄는 성령충만의 법칙]에서 ‘성령충만’이 빚어낼 변화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산다면 경제적으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분명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결과가 나타나 전 세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미국의 모든 신자가 매일 아침 성령 충만한 모습으로 일터에 나가 최선을 다해 일한다면 일의 질이나 생산력이 크게 증대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신자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올바른 동기로 행한다면 사람들의 태도가 개선되고 사기가 크게 진작될 것이다. 마음이 즐거우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아이디어들이 저절로 생각나게 되고 혁신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미국의 모든 신자가 가족과 친구들은 물론 일상에서 마주치는 낯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면 증오와 분노와 불신이 사라져 노상폭동, 폭력, 범죄, 온갖 형태의 학대가 종적을 감추게 될 것이다. 이렇듯 성령 하나님은 우리 몸에 활력을 주시고 정신을 깨우치시며 열정을 자극하신다. 성령 충만을 통해 우리 속의 잠재력이 발휘될 것이다. 성령은 우리의 잠재력을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