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눅 21:19
한 줄 노트
- 기분에 좌우되는 우리에게는 ‘기도해야 할 것’과 ‘결단해야 할 것’을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묵상질문
지금 당신의 삶에서 ‘기도해야 할 것’과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인 목록을 작성해봅시다.
묵상 레시피
(누가복음 21:10-19)
10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 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 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 성도들이 ‘장차’ 겪게 될 일들은 무엇입니까? (10-12,16-17절)
- 이 일에 대해 성도가 가져야 할 마음과 태도는 무엇입니까? (13-14절)
- 어떤 약속에 근거하여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15, 17-18절)
성도들이 겪게 될 혼란들(10-12절)
예수님은 정치적인 대 격변, 우주적인 대 혼란을 언급하신다. 이는 가까운 미래와 보다 먼 종말의 때에 일어날 일 모두를 투영하고 있다. 성도들이 겪게 될 두 가지 박해는 믿음으로 인해 법정에 서게 되는 것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이다. ‘손을 대다(헬, 에피발로)’는 죄수를 끌고 갈 때 사용하는 단어로 예수님이 잡히실 때 쓰인 단어다. 예수의 제자라면 마땅히 받게 될 고난을 뜻한다.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13절)
두 가지 의미가 있다. 1)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당하는 것은 그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다. 2) ‘너희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즉, 너희가 복음을 증거 할 기회가 될 것이다.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14절)
누가복음은 이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 계산을 경계한다. ‘명심하라(헬, 티데미)’는 ‘결심하다’는 의미다. ‘변명하다(헬, 아폴로게오마이)’는 무죄 언도를 위해 말하거나 비난 혹은 책임을 벗어나기 위해 말하는 것을 가리킨다. ‘미리 궁리하다(헬, 프로멜레탄)’는 ‘예행연습을 하다’는 뜻이다. 성도는 인간적 반응을 삼가고 성령의 이끄심을 신뢰해야 한다.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15절)
‘구변(헬, 스토마 – 히, 페흐)’은 말, 언어, 발언, 언변, 대언 등에 사용된다. 맥락 상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말씀’을 뜻한다. ‘지혜(헬, 소피아)’는 성령과 관련된 지혜로 인간이 가진 세상적 지혜와 대조되는 표현이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성령의 지혜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행 6:3, 10).
거듭난 자로 살기
오늘 묵상 제목이 “기분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입니다. 본래 제목은 “The realm of the real”인데, ‘현실의 영역’ 쯤으로 번역하면 좋을 듯합니다. 오늘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첫 단락과 둘째 단락 연결이 쉽지 않습니다. 혹시 비디가 편집하는 과정에서 별개의 두 글을 합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이해는 어렵지만 오늘 묵상이 우리에게 분명히 전달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분’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분의 발견]이라는 책의 저자 홋시는 IT 기업에 취직한 후 6개월 만에 우울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약 4년 간 고생하며 병을 고칠 여러 방법을 찾던 중,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글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책에 나오는 아주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생각’을 하는 횟수가 약 7만 번이며, 그중 80%는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한다. 어째서 우리는 이렇게 부정적일까? 우리 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 사바나에서 사는 동물들과 우리의 생활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보다 신체 능력은 뛰어났겠지만, 격투기 선수보다는 약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의 능력으로 사바나에서 살아가려면 부정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바나에서 깊게 잠들지 못했을 것이다. 풀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식동물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죽음과 직면한 것과 마찬가지였을 테니 말이다. 긍정적이고 덜렁거리는 성격의 조상들은 아마 잡아먹혔을 것이다. 부정적이고 경계심 강한 조상들만이 살아남아 자손을 남겼으리라는 사고가 합리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경계심 강하고 부정적 정신이 끊임없이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어지간히 운이 나쁘지 않는 한, 자다가 습격을 받을 일은 없다. 문단속을 제대로 했다면 푹 자도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거의 일을 후회하거나 다가올 미래에 느낄 공포를 자꾸 떠올린다. 그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은 정말이지 조상 탓이지 않을까?
거듭난 자의 특권은 무엇일까요? 문제는 우리가 거듭난 후에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과거의 습관으로 인해, 우리의 ‘새 생명’을 표현하는 방식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챔버스가 오늘 본문을 누가복음 21장 19절로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거듭난 자로서 우리의 영혼을 얻는 방법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내란 과거의 습관에 굴복하지 않고 새로운 영으로 사는 자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일까요? 챔버스가 이런 표현을 씁니다.
“우리는 훈련되지 못한 자신의 본성을 탓하는 대신에 마귀를 탓합니다.”
박영선 목사님이 쓴 [생각하는 신앙]에 나오는 글을 생각하며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진리나 사실에 관한 문제를 기분이나 감정에 휩쓸려 결정하지 않습니다. 가령 몸이 아파서 회사를 안가는 사람은 있어도 기분이 나쁘다고 회사를 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고 싶지 않다고 안 나가는 일은 기분에 좌지우지되던 아이 때나 가능합니다. 철이 든다는 것은 자기 기분과 별개로 엄연한 사실 앞에 자신을 길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분에 따라 무언가를 결정한다면 훈련되지 않은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그럼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요? 시시각각 변하는 기분에 의지하지 않고 영원한 실재이며 진리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임하는 대부분의 불행은 ‘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 때문에 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영적인 결단과 담력이 삶 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 해석하기 쉽지 않은 영어 단어 중에 하나가 ‘moods’ 입니다. 아마 가장 적절한 표현은 ‘기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챔버스는 우리가 ‘기분’ 때문에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기분은 ‘기도’로 해결되는 문제 아니라 ‘결단’의 문제라는 것이죠. 이유가 무엇일까요? 챔버스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발로 차버려야 떠납니다. 기분은 언제나 물리적인 조건과 깊은 관계가 있지, 도덕적(영적, 내면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거나 마귀를 탓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해야 할 영역이 있고 우리가 노력해야할 영역이 있습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와 우리의 노력, 결단은 함께 가야합니다. 헨리 나우웬도 그의 책 [기도의 삶]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도와 행동은 절대 상충되는 것이나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행동 없는 기도는 무력한 경건주의로 변질되고 기도 없는 행동은 의심스런 조작으로 전락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삶이 무기력하지 않도록, 무력한 경건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노력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내면에 ‘교활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노력만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교만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분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기도해야 할 것과 노력해야 할 것을 구별하십시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발 달린 기도’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또한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수고하는 손’으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기분에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