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 3:12
한 줄 노트
- 오로지 하나님께만 유용한 존재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입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거룩함의 증거를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묵상 레시피
(창세기 39:1-5)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빌립보서 3:12)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요셉의 신분은 어떻게 변화해 갑니까? (1,4절)
- 요셉이 주인의 눈에 든 이유는 무엇입니까? (2-3절)
- 요셉을 택하여 세웠을 때 그 가정에 어떤 일이 생깁니까?(4-5절)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2절)
요셉은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애굽 사람에게 팔린다. 일반 노예와 다름없던 요셉이 주인의 눈에 든 것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 ‘형통함’을 통해 드러났기 때문이다. ‘형통한(히, 마츨리아흐)’은 ‘번영케 하다, 번영을 체험하다’라는 뜻으로 요셉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그 형통함을 경험하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가정 총무로 삼고(4절)
‘은혜를 입다’는 보디발이 요셉을 ‘자상하고 신뢰 가득한 눈으로 지켜보고 인정했음’을 뜻한다. 여러 노예 중 하나였을 요셉은 보디발에게 선택되어 가정 총무가 된다. ‘섬기매(히, 솨라트)’에 쓰인 히브리어는 ‘일’이라는 포괄적 개념, 혹은 비천한 일을 나타내는 데 쓰이는 ‘아바드’와 차별된다. ‘솨라트’는 ‘중요한 인물이나 통치자를 섬기는 것’을 가리키며, 요셉이 보디발을 개인적으로 수종드는 비중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디발은 요셉의 손에 자신의 소유를 다 ‘위탁(히, 나탄, 완료형)’했다. 모든 책임이 확실히 요셉에게 위임된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은 그 집에 복을 내리시는데, 전적으로 ‘요셉을 위한’ 일이며, 그 복이 모든 소유에 미쳤다. 본문은 요셉이 ‘종’으로 있던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매 순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보았다고 반복하여 언급한다(39:2-3,21-23).
진정한 거룩 제대로 알기
챔버스 당시에도, 지금도 사람들은 ‘거룩’이라는 말을 조금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최근 거룩 운동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박물관에 놓아두실 특별히 거룩한 부류들을 만들어내시는 것처럼 잘못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이런 식의 개인적 거룩의 개념에 빠져든다면 당신 삶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삶에 나타나는 소위 ‘하나님의 일들’이 될 것입니다.”
챔버스의 지속적인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경건을 이루는 일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룩’이 우리의 삶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자꾸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로 거룩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마치 ‘예정론’을 주장하면서 ‘자본주의’가 태동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들을 예정하셨다면, 우리가 택함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인 증거였습니다. 경건주의와 청교도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깨끗하고 절제된 삶의 결과로 돈이 모이고, 그 모인 자본으로 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부자가 되는 것을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결과로 여기게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예정론이 자본주의 태동의 근거가 되었다는 것도 일정 부분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경건과 택하심의 근거로 주장하는 축복이 결코 거룩한 모습으로 귀결되지만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종 예수를 잘 믿는다면, 아프거나 병에 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건한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일들을 통해 증명해주셔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의 고통에 내어주신 하나님만 보아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십자가에 달리게 내어주신 그분이 왜 우리들만 고통에서 피하도록 하시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잘 믿는 증거로 물질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면 예수님은 왜 부자 청년 관원에게 재산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오라고 하셨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은 경건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거룩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상관없이 진실로 주님께 당신 자신을 완전하게 맡겼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관계 속에 있을 때는 다른 어떤 것으로 증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관계 속에 있을 때는 상황이 어떠한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상황과 결과를 가지고 관계를 증명하려고 한다면, 그 상황에 따라 관계의 유무가 달라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이 그런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1-13절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결코 사람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이 완벽하기 때문에 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 나타나는 완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완전함’이란 무엇일까요? 놀라운 것은 이 ‘완전함’이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부적절한 상황 가운데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무척 당황스러운 일을 경험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이 그 부르심과 전혀 관계가 없을 때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는데, 막상 해야 하는 일이 주어진 사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사실은 그런 상황이야 말로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알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요? 완전한 관계 속에 있다면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눈에 비치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 완벽하게 보일 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완벽한 삶을 사는 것을 보니, 굳이 하나님 없이 인간의 노력만으로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감리교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부패하기 쉬운 몸에 살고 있는 동안 인간이 할 수 있는 완전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다오.”라고 하는 명령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네 마음을 다하고 혼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총체입니다.
그럼 완전한 관계 속에서 살도록 하는 부르심이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는 의지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우리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갈망을 갖도록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나의 유용성’이 가려지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거룩함을 자랑할 수 있는 곳에 놓아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원한다면, 주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