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사 6:5
한 줄 노트
- 성령께서 우리의 무서운 죄를 드러내실 때,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실 때에는 그 죄를 고치시고 우리를 사명자로 삼으시려는 의도임을 기억하십시오.
묵상질문
하나님 앞에서 무섭게 죄를 회개한 경험이 있습니까?하나님께서 그 죄를 다루신 후 어떤 사명을 주셨습니까?사명의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깊이 묵상합시다.
묵상 레시피
(이사야 6:5-8)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 하나님을 뵙게 된 이사야는 무엇을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5절)
- 스랍이 이사야에게 한 행동과 의미는 무엇입니까? (6-7절)
- 뒤 이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8절)
- 이사야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8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5절)
이사야는 죄악 된 삶 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대면한다. 자신의 부정과 백성의 부정 즉, 개인과 공동체의 죄악을 깨닫고 고백한다. 이사야는 선지자였으나 속한 공동체의 부정한 언어와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선지자라 해도 초월적 존재가 아니며 땅에 발붙인 자인 것이다.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입술에 대며 이르되(6-7절)
입은 인간 존재의 중심이며, 선지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중요한 신체 기관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음에 절망한다. 옛 자아를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대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속량’으로 이어진다. 옛 자아는 죽고 새로운 삶과 사명으로 부름 받는다.
1. 죄의 심각성
우리는 가끔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도 우리처럼 죄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 적이 있을까? 지금도 죄의 문제와 싸우고 있을까?’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난 1월 3일 묵상 ‘구름과 어둠’에서 챔버스 역시 죄로 인해 고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 역시 소명을 받을 당시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지적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챔버스는 오늘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루시는 방법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어떤 ‘막연한 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깨닫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무서운 일입니다.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특별한 죄에 집중하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고정된 죄성을 드러내십니다.”
“고정된 죄성”이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서 잘 뽑히지 않는 죄일 수 있습니다. 다른 의미로는 너무 깊이 숨어 있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 죄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면 우리 존재 자체를 뒤흔들어 놓으십니다. 뿌리를 흔들어서 그 정체를 드러나게 하십니다.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었던 무서운 죄가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항복이란 죄악에 뿌리박힌 의지를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죄성을 다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은 이 ‘죄성’을 너무 쉽게 다루기 때문 아닐까요? 너무 쉽고 막연하게 죄를 고백하면서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해 ‘죄를 세탁’하는 수준에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세탁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될 때, 죄의 습관적인 회개만 일어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그의 내면을 흔들어 놓으셨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온 존재가 하나님의 존전에서 무서워 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의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깊이 뿌리박힌 죄의 본성을 하나님께 내놓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무서운 것은 피상적인 죄의 고백을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다루지 않으신 상태에서 스스로 죄를 세탁하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2. 성령께서 다루심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의 심각성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에게나 하찮게 느껴지는 신앙인에게나 동일합니다. 죄에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습니다. 온전히 죄성의 근본을 다루어야 합니다.
첫 번째 주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령께서 죄를 다루지 않으실 때, 우리는 아주 피상적인 단계로 죄를 인식합니다. ‘무엇을 잘 못했는지 모르지만 저는 죄인입니다. . .’와 같은 태도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이러한 성도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한다고 하면서, 혹여 자신을 속이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어쩌면 죄를 우리 자신에게 고백한 후, 스스로 용서한 것은 아닐까요?
디트리히 본회퍼는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죄 고백은 자기를 속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고백하고 용서해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섰을 때는 이런 거짓 고백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속에 역사하실 때, 아주 무섭고 정확하게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지적하십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의 경우는 그의 ‘입술의 부정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알지 못하지만, 이사야와 성령님 사이에서는 그것이 무엇인지 분명할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명확해지면 성령님은 그 부분을 더 명확하게 다루어 가십니다. 오늘 묵상에 인용된 이사야 말씀입니다.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술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7)
놀라운 일은 부정한 입술을 고치시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죄성이 드러나면 그것을 고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고치신 부분을 놀랍게 사용하십니다.
“죄성이 집중적으로 드러날 때에는 그 죄성을 제거하기 위해 정결케 하는 불을 그곳에 대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다루실 때, 우리의 죄와 연약함이 사명의 도구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약함을 자랑할 수 있었던 이유도 그 약함을 하나님께서 강하게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약함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바울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역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실 수 있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