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마 16:24
한 줄 노트
- 개별성의 껍질에서 나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순종할 자세를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개별성이 깨어지지 않으면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자기 부인’의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묵상질문
당신의 내면에서 주장하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그 외침은 ‘자기주장’인가요, ‘자기 부인’인가요?
묵상 레시피
(요한복음 20:24-29)
24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16:24)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도마는 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까? (24-25절)
- 도마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26-27,29절)
- 도마의 고백은 무엇입니까? (28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도마는 충성스럽지만 확실한 판단에 근거해 움직이는 사람으로 나타난다(11:16, 14:5). 그는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말하면서도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라며 분명한 이해를 요구한다.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도마는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는 말로 한결같은 성품을 드러낸다. 이후 도마는 두 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을 주로,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믿음의 조건’으로 말했던 자신의 언급을 그대로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도마가 말한 그 때에 그 말 그대로를 듣고 계셨다.
1. 개별성이란?
챔버스의 묵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별성’(individuality)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인격성’(personality)입니다. 이 둘의 관계를 잘 이해하는 것은 [주님의 나의 최고봉] 전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합니다. 챔버스가 추구하는 ‘순종의 삶’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개별성’을 넘어서, 성령께서 주시는 ‘인격성’으로 변화되는 훈련의 시간을 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훈련의 장으로 인도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결코 강압적으로 일하지 않으시며, ‘인격적’ 관계를 중시하신다는 것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이해하기 원한다면 3월 1일과 11월 18일 묵상을 다시 한 번 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묵상에서 챔버스는 ‘개별성’에 대하여 조금 더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개별성은 한 인격체를 껍질처럼 보호하기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생명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개별성을 뚫고 나와야 하며 이때 개별성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오늘 묵상은 어제 묵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훈련의 과정을 통해 육적인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었다면, 개별적 본성이 깨어지는 과정을 통과해야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창세기]에 나오는 글이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고집과 개별성을 신성화하는 경향이 있다. 나아가 그것을 우리의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지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경멸할 만한 약점이라고 보신다. 가장 위대한 의지를 지닌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럼에도 그분은 자신의 의지를(우리가 생각하는 ‘의지’의 개념에서) 절대로 행사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삶은 온유함과 순종이었다. 우리 주님께는 독자적인 것이나 자신의 의지로 가득 찬 것이나 자기주장 같은 것이 없으셨다.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낭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에게 온유하고 겸손한 영을 주실 수 없다. 우리는 이 멍에 곧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 개별적으로 만드셨고, 그 개별성에는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과 욕망이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도록 계획되었지만 죄로 인해 타락한 개별성은 이러한 본래적 본성에 반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별성’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별성이 살아 있으면 늘 마음속에서 ‘나는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하죠. 즉, 믿음을 방해함으로 순종의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제자의 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
개별성을 가진 채로 주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을 버리고 종의 마음으로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2. 인격성이란?
개별성의 본성은 아주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독립성을 주장하면 개별성은 영적인 삶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이 부분을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여기서 “목숨”이라는 말은 육체적 생명도, 영혼도 아니고 우리 ‘자아’를 나타낸다. 생각하고, 느끼고, 계획하고, 결정하는 자아, 즉 인간의 ‘인격’이다.
따라서 자신을 그리스도께 위탁하는 사람은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의 개성을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의지는 실제로 그리스도의 의지에 굴복되어 있지만, 속성은 그리스도의 속성에 흡수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잃을 때는 오히려 자기를 발견하여 진정한 자기의 본모습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자기를 잃어야 한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도 준엄한 명령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주님은 대충 건성으로 따르는 것을 원하시지 않고, 열정적이고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기를 요구하신다.
만일 ‘나는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개별적 본성이 그 믿음을 방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별성을 가지고는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영은 믿지 않을 수 없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성령께서는 분명 당신이 개별성을 양보해야 하는 자리까지 몰고 가실 것입니다. 이때 ‘나는 할 수 없어요’라고 하든지 아니면 성령님께 항복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정직하게 우리의 개별적 본성이 어떠한지 보도록 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인격성이 성령님께 순종하면 개별성의 껍질이 깨어지고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을 보게 됩니다.
인격성은 우리의 믿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아를 깨뜨리도록 합니다. 개별성이 가지는 이기심을 하나님께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신의 독립적인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 안에 참 생명이 자라날 기회를 얻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