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 3:3
한 줄 노트
- 하나님 없이 살아보려고 애쓰는 삶은 불안정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면 큰 평강이 우리 안에 찾아옵니다.
묵상질문
당신은 평안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 품 안에서 안전하십니까?
묵상 레시피
(레위기 16:11-16)
11 아론은 자기를 위한 속죄제의 수송아지를 드리되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 자기를 위한 그 속죄제 수송아지를 잡고
12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 앞 제단 위에서 피운 불을 그것에 채우고 또 곱게 간 향기로운 향을 두 손에 채워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지 아니할 것이며
14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가져다가 손가락으로 속죄소 동쪽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3)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15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휘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
16 곧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과 그들이 범한 모든 죄로 말미암아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고 또 그들의 부정한 중에 있는 회막을 위하여 그같이 할 것이요
(골로새서 3:3)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 아론은 누구를 위해 속죄 제물을 드립니까? (11절)
- 지성소에 들어갈 때 무엇으로 속죄소를 가립니까? (12-13절)
- 아론은 왜 지성소에 들어가 피를 뿌립니까? (14-16절)
자기와 집안을 위하여 속죄하고(11절)
레위기 16장은 일 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속죄일’을 배경으로 한다. 하나님은 이날 성소, 회막과 제단, 제사장과 백성의 회중을 위해 속죄한다(33절). 하나님은 부정한 것과 함께 하실 수 없다. 죄가 만연할수록 성스러운 영역도 타협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나님은 성소와 성직, 택하신 백성들이 거룩과 순수성을 유지하도록 요구하신다. 속죄일에 임무를 수행하는 대제사장도 죄와 흠이 있는 인간이었다. 때문에 속죄를 위해 본인과 가족들의 속죄를 행했다. 예수님은 속죄가 필요 없으신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해 속죄를 행하셨다(히9:7,11)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게 할지니(13절)
지성소는 극히 제한된 공간이었다. 하나님은 지성소에 들어와 임무를 수행하는 대제사장을 위해 분향한 향연, 즉 연기를 피워 속죄소를 가리게 하신다. 이는 곧 대제사장을 가리는 연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대제사장이 그분의 임재를 보거나 영광에 압도되지 않고 생명을 보존하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가리시고 살리신다.
구속의 은혜로 사는 것
오늘 묵상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감추어진 생명’이라는 말의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묵상의 첫 문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성령은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우리의 새 생명이 얼마나 진실하고 영원토록 안전한 것인지를 증거하십니다.”
어제 묵상을 잠시 기억해 볼까요?
우리가 주님의 구속에 참여하는 것은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의 목적이 드러나고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도록 삽니다. 그러니 ‘감추어진 생명’이란 주님의 구속으로 인해 완전히 새롭게 된 자아를 말하는 것이죠. 감추어졌다는 의미는 자신의 권리를 주님께 내어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늘 챔버스 묵상의 요지는 이 감추어진 생명이 귀하고 복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많이 두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주의 백성이 어떻게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느냐는 것이죠.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과 성화의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에 달린 문제이니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챔버스의 오늘 묵상 글이 우리에게 큰 용기가 됩니다. 그리고 수긍이 됩니다.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위태로운 삶인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가장 안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삶에, 그리고 그 삶의 뒤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자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다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쉽고 안전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보다 더 안전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4장 26-27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감추어진 삶은 안전합니다. 가장 확실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제 당신 안에 감추어진 새 생명이 있는지 한 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인으로서 빛 가운데 사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마치 산꼭대기 높은 곳에서 아슬아슬하게 조심해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죠. 만일 그런 느낌으로 살고 있다면 아직 참 생명이 당신 안에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종종 교인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목사님은 참 불편하시겠어요. 여기저기 사람들이 알아보기도 하고, 사택이 교회에 있어서 모든 것이 다 노출되어 있어서 말입니다. 목사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지 않으세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산데, 교인들이 알아보니 얼마나 좋습니까? 목사로서 사는 것이 불편하면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저는 어디가든지 제 신분부터 밝힙니다. ‘저 목삽니다!’라고 말이죠. 만일 제가 불편함을 느낀다면 목사로서 못할 짓을 하고 있거나,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을 때가 아닐까요?”
사실 새로운 생명을 가진 우리가 거룩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한 일이 아니어야 정상입니다. 챔버스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라는 말을 의심해 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평안을 주시겠다고 했는데도,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데도, 평안하지 않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니까요.
감추어진 생명이 있는 자에게 주님은 ‘평안’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이 줄 수도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비로소 평안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평안과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여전히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품 안에 자신을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 좋은 찬양이 있습니다.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라는 찬양을 부르며 우리를 안전케 하시는 주님을 고백하면 좋겠습니다.
내 아버지 그 품 안에서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주 손길로 내 삶을 안으시니 그 평강이 나를 덮습니다.
나 비록 넘어지며 흔들리지만
주 내 안에 거하며 나를 붙드시니
내 생각을 주께로 돌리고 주시는 평강의 옷을 입습니다.
주 약속 안에서 내 영혼 평안해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계획 나 신뢰해
두려움 다 내려놓고 주님만 의지해
주 안에서 내 영혼 안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