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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 사랑은 선택이다!

(창 2:16-17)

들어가는 이야기 – 의문!

오늘의 말씀을 묵상팀이 먼저 묵상하고, 그 묵상을 서로와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청년이 아주 흥미로운 말을 했습니다. “저는 설교문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어려운 질문, 솔직한 해답’ 보다는 ‘어리석은 질문, 필요한 해답’의 의미로 묵상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묵상팀 최 권사님이 이런 나눔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쉽게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선악과와 같은 질문들을 마음속에 품고 삽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신앙이 자라가면 어느 날, 당시에는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성경적이고 명쾌한 해답을 듣는다 해도 나의 관점이 바뀌기 전까지는 그것이 진정한 정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신비의 영역’에 있는 것입니다. 신비 속으로 들어가야만 이해가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의 욕망이지만 유혹이기도 합니다.

왜 선악과를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 우리를 인격적인 관계로 대우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셨습니까?” 라고 따진다면, 왜 이렇게 큰 자유를 우리에게 주셨느냐고 대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도록 인간을 창조하시고 죄를 짓도록 선악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체로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방점은 ‘자유의 축복’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자유보다 ‘금하신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면 갑자기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 더 이상 축복으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타락을 모르셨을까?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한다면 선악과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참 어려운 길을 가고 계시는구나. 하나님께서는 길고 긴 고통의 과정을 통해 우리와의 관계를 원하셨구나.’ 선악과 사건은 하나님의 무지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고 우리와의 사랑을 만드시기 위한 가장 분명한 러브스토리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럴만한 자격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며,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일방적인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대우 하셨듯이, 그에 합당한 인격적인 대우를 받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선택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고 행동하는 로봇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의지자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저는 사랑이란 선택받기를 원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어떤 사람은 “왜 나에게 이런 시험을 주시나요?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다면 시험에 빠지지도 죄를 짓지도 않았을 텐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에게 선악과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깊은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 선악과가 없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 제가 사랑하기에 이것만은 지키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고, 진정한 교제를 하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선악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단해 봅시다.


추천도서

『GOOD or GOD? 무엇이 선인가』
존 비비어 저 (두란노,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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