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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위한 곳에서

요 12:1-8

주를 위한 자리에서 일어난 일

오늘 말씀은 아주 유명한 기적 사건 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 이 세 복음서에 모두 한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습니다. 또한, 앞의 두 복음서에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과 그녀를 비난한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으나, 요한복음에는 모두 등장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요 12:1)’라고 기록되어 있는 요한복음의 사건을 단순히 ‘식사하실 새’라고 기록한 다른 두 복음서와는 다른 사건으로 보고 싶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잔치’ 한 이 자리는 감격스러운 자리이자, 결연한 자리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일주일을 기록하는 시작점입니다. 또한 나사로를 살린 일로 인해 예수님을 죽이려는 모의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합니다. ‘주를 위한 자리’가 그리 낭만적이지 만은 않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유대 공동체에서 이단아가 되거나,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주를 위한 자리’는 단순히 마리아가 옥합을 깨고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사건이 아니라, 목숨을 내어놓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헌신

  ‘주를 위한’ 이 잔치 자리에서 마르다는 주님을 위해 일을 했고, 나사로는 주님을 초청한 자리에서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었으며,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각기 다른 이들의 모습은 모두 ‘헌신’이었습니다. 헌신은 주님을 위해 드리는 ‘거룩한 낭비’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를 위한’ 자리, 그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그저 ‘낭비’로만 보입니다.

“목욕물을 버리려다 애까지 버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놓아야 하는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본질이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고민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순전한 나드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은 마리아의 행동이 평범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으로 하는 행동은 주변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리아의 사랑의 헌신을 ‘계산’한 가룟 유다는 그녀의 행동에 대해 매우 분노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유다의 생각이 거짓이었고, 그가 사실은 도둑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을 우리의 논리와 가치로 계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하는 일을 간직하고 기념하고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의 헌신은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 당연히 받을 수 있는 마음이라고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깊은 헌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핏방울까지, 주님의 깊은 헌신은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헌신 또한 주님의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깊은 헌신을 한다는 것은 주를 위한 곳에서 우리의 사랑을 가장 깊이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헌신은 최고의 사랑에 대한 반응입니다.

헌신은 사랑이지만 아픈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만큼이나 큰 아픔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줄 수 있을 때가 아닌가요?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추천도서

『나를 사랑하느냐』
옥한흠 저 (국제제자훈련원(DMI), 201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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