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나라니,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요 3:1-8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오고, 또 누군가에게는 끊임없는 노력과 고뇌의 시간을 통해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많이 배우고, 준비되고, 진리를 찾아 고뇌한 니고데모는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거듭남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 니고데모의 모습과 닮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20세기 가장 유능한 변증신학자로 불리는 C. S. 루이스입니다. 그는 햇살이 따스한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윕스네이드 동물원으로 향했습니다. 동물원으로 출발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지 않았으나, 동물원에 도착했을 때에 그는 믿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
아는 것을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이 오히려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이스라엘의 역사, 그들의 이야기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던 많은 무리가 그들의 필요가 채워질 때는 기꺼이 주님을 따라다녔지만 더 이상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자 예수님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았지만, 믿지는 않았습니다.
거듭남은 무엇인가?
유진 피터슨은 ‘거듭남’을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위로부터의 사고는 전적으로 다른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사고에서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교회 공동체에서도 세상의 사고를 가지고 있으면, 돈이 하나님보다 더 커 보이고, 돈 앞에서 신앙도 자존심도 버리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권력을 쟁취하려고 싸우기도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세상과 똑같이 타락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 vs. 놀랍게 여기지 말라!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필요의 해결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필요를 해결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바라보기 원하셨습니다. ‘거듭난다’는 의미를 ‘두 번째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했던 니고데모와 달리,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는 초월적 은혜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거듭남은 ‘죄의 고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죄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옛 생활이 아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변화됩니다(고후 5:17).
거듭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세속적 욕망에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는 말입니다.죄를 회개하고 세례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표적을 바라보며 욕망을 채우는 신앙이 아니라,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 나라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건너, 더 이상 옛 삶에 미련을 두고 살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추천도서
『니고데모의 안경』
신국원 저 (IVP, 2015.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