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가랴 – “공동체의 회복”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
(스가랴 9:9)
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관계회복의 시작 “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 라는 질문을 가지게 되죠. 흥미로운 것은 ‘왜?’ 라는 물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시작됩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그것은 ‘성전건축’입니다. 이웃의 방해공작으로 멈춘 성전을 재건하여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시고, 그 성전을 통해 오실 메시야를 기대하라고 말씀하는 것이 스가랴의 핵심이죠.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는 ‘성전건축’ 이였습니다. 이를 통해 절기와 예배가 회복됨으로 다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던 것이죠. 스가랴의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당연하게 따라 나와야 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회복의 두 번째 발걸음이 바로 ‘공동체’를 세우는 일입니다.
왕이 임하신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회복의 근간이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스가랴 선지자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라고 선포합니다. 왜 그럴까요? ‘왕’ 이 우리들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왕은 우리는 심판하기 위하여 오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 하려고 오시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죠. 이 속성은 확실히 이전의 왕들과 다른 것입니다. 특별히 ‘공의’ 라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히 우리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는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한없는 자비하심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다른 방식의 구원과 심판인 것이죠. 전적인 은혜와 용서에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돌아오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공의’ 의 잣대로 사람을 대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공동체의 회복을 넘어 기쁨과 감사의 열매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회복의 기쁨
이로서 공동체의 회복이 우리의 자격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며 회복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자격이 아니라 자격이 없으니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오랜 정서상 부모님과 혹은 선생님께 혼이 난 후에 그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습니다. 만일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마치 반항하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일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일이며, 하나님과 눈을 맞추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구한다’라는 말이 영어의 ‘Seek’라는 단어입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멍하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자격없는 자가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주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기도하시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가장 크게 배우고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것이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요?
결단해 봅시다.
『하나님을 열망하다』 R.T 켄달 저 (두란노, 2019.12.18.)
